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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사목지자료 [가톨릭 뉴스] 김대건 신부, 마지막 ''부활'' 어디서 누구와 보냈을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choism0512 댓글 0건 조회Hit 3,022회 작성일Date 21-04-03 10:3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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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사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약 1년 만인 1846년 9월 순교했습니다.

    사실상 사제로서 보낸 주님부활대축일은 1846년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니, 김대건 신부는 10년 만에 상봉한 어머니와 함께 부활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175년 전으로 가보겠습니다.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입니다.

    1884년 4월 21일, 68회차 시복재판에 참석한 임 루치아의 증언입니다.

    <임 루치아 / 1884년 4월 21일 68회차 시복재판 증언록>
    "나는 처음으로 김 신부로부터 양지의 터골마을에서 성사를 받았다. 1846년에 김 신부는 은이마을 윗쪽에 어머니의 집에 와 있었다. 신부가 곧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신부의 어머니는 적어도 부활 첨례까지 기다려달라고 청하였다. 부활이 지나자 신부는 월요일에 떠나 서울로 갔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그러니까 부활이 지나서 떠난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어머니와 함께 부활대축일을 지내고 부활 미사를 봉헌하고 출발했다는 것이죠."

    마치 사제인 아들이 곧 순교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어머니는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간곡히 붙잡은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주님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장소.

    수원교구 은이성지에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은이성지는 1800년대 신앙인 공동체가 모여 살던 교우촌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이곳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됐습니다.

    또 사제가 된 뒤에 돌아와 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봉헌한 주요 사목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원교구는 2013년 옛 은이공소 터를 매입해 성지를 조성했습니다.

    성지에는 김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이 복원돼 있고, 김대건 신부 기념관도 있습니다.

    <맹현균 기자>
    "이곳 은이성지에는 이렇게 야외에 제대가 마련돼 있습니다. 뒷쪽을 보시면 성 김대건 신부의 성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는 1846년 4월 이곳 은이성지 인근에서 주님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돼 약 10년 만에 사제가 돼 찾아온 고향에서 주님 부활의 기쁨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김대건 신부는 급히 서울로 향합니다.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바닷길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조선시대 효가 있고 충이 있어요. 우선순위로 따지면 충이 훨씬 더 우선이에요. 마찬가지로 사제 입장에서는 주교님 명이 더 앞서죠. 어머니에게 마지막 선물을 보여주신 게 아닌가,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로서 어머니에게 부활 전례를 선물해 드린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임 루치아는 시복재판 증언록에서 "김대건 신부는 응이 상뜸이 모친댁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응이 상뜸이, 여기서 은이는 ''숨겨진 동네'',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은이 교우촌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상뜸이는 윗마을이라는 뜻으로, 그러니까 응이 상뜸이는 지금의 은이성지 바로 옆 골배마실 성지를 가리킵니다.

    <맹현균 기자>
    "이곳은 성 김대건 신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골배마실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가 돼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처음 상봉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뒷편에 보이는 산을 넘어가면 은이성지가 있는데요. 박해시대때 교우촌은 대부분 이렇게 외진 곳에 형성이 돼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하느님 찾아서 혹은 피난을 하기 위해 떨어진 곳에 살았다는 것, 한 번 바라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옛 신자들은 그렇게 공간에 상관없이 하느님이 어디나 계신다 라는 것 생각하시면서 거기서 전례를 했을 테니까요. 그러한 것들 잘 보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순교 22일 전,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적었습니다.

    이 편지를 남기면서 아마 김대건 신부는 어머니와 함께 봉헌한 주님부활대축일 미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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